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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 16대 임금, 소심한 왕 인조

by 리액션스타 2023. 11. 21.

1. 인조는 누구인가?

인조는1595년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의 손자인 정원군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5대 광해군과는 숙부와 조카 사이로 훗날 인조반정을 계기로 16대 왕이 됩니다. 인조는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살턴 집터가 왕의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말을 듣고 정원군의 집안을 초토화 시켜버렸거든요. 인조의 동생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하고, 아버지 정원군도 이런 일 때문에 병을 얻어 죽게됩니다. 광해군 때문에 소중한 가족들을 잃은 인조의 입장에서 광해군이 얼마나 미웠겠어요. 그러던 와중 실리 보다는 명분을 중요시 했던 조선 시대에 중립외교를 펼친 광해군에 반감을 사고 있던 서인들과 함께 반정을 일으키니 이것이 인조반정이고 1623년 조선의 왕이 됩니다. 이후 26년간이라는 긴 시간을 재위에 있었지만 이렇다할 업적은 없고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같은 굵직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2. 인조 시대의 사건

(1) 인조반정 (1623년)

실리 보다는 명분을 더 중요시 했던 그 시절, 조선에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받아 들일 수 없었던 서인들은 인조를 앞세워 왕위를 찬탈합니다. 그리고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 명과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한다는 친명배금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후금은 계속 강해지고 있었던 반면 명나를 점점 쇠약해 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조선의 친명배금 정책은 이를 못 마땅해 했던 후금의 조선 침략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2) 이괄의 난

역사적으로 많은 혁명 뒤에는 항상 논공행상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분명히 내가 혁명에 공을 더 많이 세웠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나 보다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사람이 아첨과 정치로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인조 반정 이후에도 인조의 총애를 받던 서인 김유와 실제로 행동 대장 역할을 했던 이괄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괄이 김유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괄은 인조반정 이후 다시 본인의 업무르로 돌아가 북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유가 이괄을 계속 모함했고, 이괄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까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아들을 잡기 위해 조정에서 관리들이 파견되었습니다. 이괄은 "아들이 역적인데 그 아비가 무사한 경우가 있느냐?"라면서 그들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일이 커지자 이괄은 군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이괄의 난은 끝이 납니다. 이때 이괄 수하에 있던 부하들이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을 침공하자고 하면서 또 하나의 전쟁 정묘호란이 발발하게 됩니다.

 

이괄의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조선 역사상 개인이 일으킨 난 중 유일하게 도성 한양을 빼앗은 난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괄은 임진왜란 이후에 민병을 일으켜 많은 성과를 일으키고도 조정으로 부터 대우 받지 못하고 도망다니던 호걸들을 모아 그들을 대접하고 함께 생활하기도 한 상남자라고도 합니다.

 

 

(3) 정묘호란 (1627년)

이괄의 난 실패 이후 이괄의 부하들이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을 치자고 설득합니다. 후금은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명분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 조선의 백성이 조선을 치자고 하니 후금은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 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합니다. 그런데 선조 때 부터 이어온 습관인지 인조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버립니다. 후금은 곧 형제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시했던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게 되면서 정묘호란이 끝이 납니다.

 

(4) 병자호란(1632년)과 삼전도의 굴욕

후금은정정 강해졌고 청나라가 되었습니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형제관계가 더 이상 국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정묘호란이 끝이 난 후 5년 뒤인 1632년 조선에게 형제관계가 아닌 군신관계 즉, 임금과 신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이제 청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정에서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라는 척화론자와 우리 보다 이미 강해져 버린 오랑캐는 이길 수 없으니 화합하자라고 하는 주화론자의 주장이 팽팽하게 갈렸습니다. 결국 척화론자의 의견이 우세하여 청나라와의 또 한번의 전쟁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자 마자 역시 인조는 강화도로 또 피신을 가려 하였지만 청나라가 이를 알고 재빨리 길목을 막는 바람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갖히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니 않아 인조는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제 신하로써 예의를 갖춰야 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지금 잠실의 삼전도까지 걸어와서 제단을 쌓고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합니다. '삼궤구고두례'라고 하여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3번씩 3번, 총 9번을 청나라 황제에게 절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멸시하였던 청나라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맞본 이것이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3. 평가

인조 시대 업적은 사실 거의 찾아 볼수가 없고 사건 사고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소심하고 비겁한 황이라고 하면 선조와 인조를 꼽을 수가 있는데 그래도 선조는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인조는 왕의 적통을 이어 받은 것이 아니고 반정으로 왕이 된 것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왕의 자리를 빼앗길까 조바심을 느꼈고 특히 아들이 소현세자가 후금에 인질로 잡혀갔지만 후금을 배우고 외교 역할을 잘 하자 이것 마저도 질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귀국하자마자 아들을 독살하였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습니다.

 

실리 보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아들을 질투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도망가버린 인조를 존경했던 백성이 과연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