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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 22대 임금, 못하는 게 없는 백성을 사랑한 정조

by 리액션스타 2023. 12. 19.

1. 정조의 탄생과 인물

정조는 1752년 조선의 제 21대 임금인 영조의 손자이자, 역적으로 몰려 뒤주 속에 갖혀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아들, 그리고 훗날 한중록을 쓴 혜경궁 홍씨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반역 죄인으로 몰려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게 외갓집으로 쫓겨가게 됩니다. 그러나 영조 뒤를 이을 왕손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 죽은 사도세자의 형, 즉 정조 큰 아버지의 양자로 입양하게 된 후에 세손 수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악행을 영조에게 낱낱히 일러바쳐 죽임을 당하게 한 노론의 시대 였고, 이런 노론은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을 것 입니다. 정조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왕이 되기 까지 혹시 자객에 의해 자신도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아침이 올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이런 힘든 상황을 무사히 잘 이겨 내고 1776년 조선의 제 22대 왕이 되었고 조선 후기 정조대왕이라고 일컬어 질 만큼 훌륭한 일을 많이 남기고 1800년 독살인지, 지병인지 많은 의심 속에 승하하게 됩니다.

 

 

2. 정조 시대의 일들과 많은 업적들

정조는 가장 완벽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시대 왕들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정조와 학문의 깊이를 논할 수 있는 왕은 우리가 대왕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세종, 그리고 900차례가 넘는 경연을 가졌던 성종 정도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뿐만아니라 무예에도 매우 뛰어나 아버지 사도세자가 적은 '무예신보'를 다시 개정하여 '무예도보통지'라는 무예 교과서를 집필합니다. 조선 시대 왕중에 무예에 뛰어난 왕을 뽑자면 고려말 전쟁터에서 실전 경험을 갖춘 태조 이성계는 논외로 하고 북벌을 꿈꾸고 기골이 장대하여 청룡언월도를 손쉽게 휘두르는 효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무예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세상에 몇 없는 사기 캐릭터 인것 같네요. 이렇게 완벽에 가까운 인간, 정조가 어떤 업적을 만들어 냈는지 한번 알아 볼까요? 

 

(1) 탕평책을 이어가다

정조는 숙종시대 부터 이어온 탕평책을 이어갑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노론에 의해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특히 노론 중에서도 아버지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관여 했던 부류를 벽파,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남인들을 다시 시파로 나누어 졌는데 정조는 벽파를 무조건 탄압하지 않고 노론과 남인들 모두 고루 등용했습니다. 특히 노론 세력의 수장인 심환지와는 몰래 비밀편지를 주고 받으며 정사를 미리 논하고 개인적인 안부도 묻는 등 진심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적인 능력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 규장각을 설치하다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궁궐 안에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합니다. 규장각의 설치 이유는 단순히 도서관을 운영하려 했던 것이 아니고 집권 세력인 노론에 맞서 정조의 세력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붕당에 관계 없이 능력이 있는 젊은 인재들을 모아 학자로 키우고 학문과 정치를 연결시키는 기구를 만들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한 것입니다. 

 

(3) 초계문신제의 실시

초계문신제는 글자 그대로 '문신들을 뽑아서 계몽한다'라는 취지로 과거에 급제한 어린 문신들을 정조가 다시 교육을 실시하는 제도 입니다. 정조는 어린 문신들을 키워서 향후에 정조와 함게 정치 활동을 이어갈 인재로 키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과거에 급제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도 이제 막 급제를 하였다면 얼마나 똑똑한 인재들이었을까요?  그런데 그런 인재들을 정조가 교육을 하는데 신하들도 정조의 학문의 깊이에 대해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위치였다고 합니다. 초계문신제에 이어 정조는 아버지는 양반이지만, 어머니가 평민 또는 천민인 첩의 자식인 서얼도 등용을 했는데 대표적인 서울 출신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가 있습니다.

 

(4) 금남전권의 폐지

조선시대에서 상인은 농민보다도 못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상인들 중에는 나라로 부터 정식허가를 받고 장사를 하는 시전 상인이 있던 반면, 오늘날의 노점상과 같이 허가를 받지 않고 장사를 하는 난전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방의 상인들이 한양으로 올라오다가 시전 상인들과 거래 하지 않고 난전 상인들과 거래하는 일이 잦아 지면서 숙종때 시전 상인들에게 난전의 상행위를 금지하게 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이 금난전권을 가진 시전 상인들이 정조대에 이르러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들에게 정치 자금을 대주면서 더 큰 힘을 얻게 되고 건달화 되어가면서 일반 상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금난전권 때문에 상업이 오히려 발달하지 않고 특정인에게만 이익이 가는 것을 본 정조는 나라가 꼭 관리해야 하는 6가지인 비단, 면포, 명주, 종이, 모시, 어물 이렇게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습니다.

 

(5) 아버지를 향한 마음, 수원 화성 축조

정조가 왕이 되자 마자 신하들에게 한 말이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합니다. 정조는 비록 반역죄로 죽임을 당했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묘소를 좀더 양지 바르고 좋은 곳으로 모시고자 찾은 곳이 수원입니다. 수원 화성을 축조하면서 조선 후기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했는데 채제공과 실학자 정약용, 그리고 단원 김홍도 등 입니다. 특히 성벽을 쌓는 돌을 옮기기 위해 정약용이 거중기를 설계하고 화성으로 가는 행차를 김홍도가 화성 횡행도가 8폭의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무엇보다 화성을 축조하는데 백성들의 노역이 필요했는데 예전에는 노동력을 무상 제공 했다면 정조는 백성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노역을 시켰습니다.

3. 정조에 대한 나의 생각

겸손할 필요가 없었던 왕 정조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정치면 정치, 애민이면 애민 어떤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아쉬운게 있었다면 좀더 오래 왕으로서 역할을 해 주었다면 조선이 몰락하는 것을 더 늦추거나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점 입니다. 정조는 자신의 병을 스스로 치료할 정도로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정작 자신의 등에난 종기 때문에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정조의 죽음을 두고 정순왕후와 노론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조금더 오래 살면서 백성을 더 사랑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