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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 25대 임금, 외로운 왕 철종

by 리액션스타 2023. 12. 28.

1. 철종은 누구인가

조선의 왕은 합법적으로 후궁을 거느릴 수 있고,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많은 후손을 갖는 것이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 궁중의 역사를 보면 후손이 매우 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정조의 자손 부터는 순조가 외동아들이었고, 이후 효명세자가 외동아들이었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 역시 외아들 즉 3대 독자였습니다. 그런 순조가 후손이 없이 또 젊은 나이에 죽자 왕의 후손을 이을 친인척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찾아 낸 사람이 강화도에서 생활하던 덕안군 이원범 이었고, 강화도에서 평민으로서의 삶을 살던 철종은 1849년 어느날 갑자기 왕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1849년 부터 1863년까지 14년간 궁궐 생활을 했고, 일반 백성들의 삶을 살아봤기 때문에 그들의 궁핍함과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왕이 되고 나서는 백성들을 위해 힘쓰려고 노력했으나 세도정치 세력들 때문에 결국 힘을 쓰지 못하고 1863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왕이 되었습니다.

 

철종 어진

2. 철종 시대의 일들

(1) 강화도령 ?

왜 이렇게 먼 친인척인 철종까지 인연을 이어가면서 왕으로 만들었을까요?  우선은 정조 시대 부터 형제들을 역모 혐의로 사사를 내려 죽이는 등 직계 친인척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은원군의 서자인 전계대원군의 또 서자 덕안군인 이원범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원범의 할아버지 은원군은 정조시절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가족 모두가 강화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귀양 생활 40년 후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서 살게 되면서 한양에서 이원범이 태어났습니다. 철종 이원범이 강화도령이라고 해서 시골 촌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한양에서 14세 까지 살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글쓰기는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양 생활을 하던 중 큰 형인 이명이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큰형은 죽고  작은형과 덕안군은 연좌제로 강화도로 또 다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강화도로 간 덕원군은 어부이자 농부, 나무꾼이자 사냥꾼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철종은 강화도에서의 삶에 더 만족하고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할아버지도 형님도 모두 역모 혐의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왕족으로서의 삶에 신물을 느꼈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한양에서 철종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 행차를 했을 때 또 역모 혐의로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작은 형과 함께 도망 가다가 작은 형은 다리까지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렇게 우여 곡절 끝에 조선의 25대 왕이 되었습니다.

 

(2) 무능한 왕 ?

철종은 왕이 되기 위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한양 생활 동안 글공부를 하였다고는 하지만 궁궐 안의 기라성 같은 신하들에 비해서는 턱 없이 부족한 교육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된 후 부터는 글공부도 열심히 했고, 특히 어렸을 때 부터 민생고를 직접 느껴온 철종은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 개혁정치를 시도하려 하였으나 당대의 세도가들에 의해 혼자만의 외침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3) 삼정의 문란

조선시대 주요 수입원은 토지세인 전세, 군역 대신 납부하는 군포, 겨울 동안 작물을 재배할 것이 없으니 봄에 쌀을 빌려 가을에 이자를 붙여 갚게 하는 환곡 이렇게 세가지를 삼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관리들이 삼정을 빌미로 너무 많은 세금을 거둬가는 바람에 백성들의 민생고가 심해진 것입니다. 군포의 경우 16 ~ 59세의 양인 남자들만 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아이인 애들에게 군포를 내게하는 황구첨정, 60세가 넘은 노인 및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거두는 백골징포가 심각했습니다. 

더 문제는 환곡이었습니다. 환곡을 이용해서 탐관오리들이 너무 많은 이자, 그리고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이자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봄에 곡식을 빌린 적도 없는데 원금에 이자까지 징수하는 경우도 있고, 빌려온 곡식에 돌이 가득 들어 먹을 수도 없는데도 이 역시 원금과 이자까지 내야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4) 임술농민봉기 (1862년)

위의 삼정의 문란 때문에 백성들이 극심한 민생고를 겪게 되면서, 결국 백성들의 인내심이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경상도 진주, 함경도 함흥, 전라도 전주 등에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농민들은 중앙 부처에서 안핵사에게 자신들이 봉기를 일으킨 이유를 호소하였고 안핵사 박규수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아무런 해결책을 내지 못하였고 오로지 철종만이 의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세도정치 세력들 때문에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3. 철종에 대한 생각

왕이 되고 왕으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도와주는 세력이 없고 혼자 남겨진 듯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아마도 철종 역시도 희망을 잃고 개혁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기 시작하였고 궁중의 편안 삶에 녹아 내린 듯 합니다. 강화도에서 농사꾼이자 어부, 나무꾼이자 사냥꾼으로서 건강했던 철종의 몸은 술과 여자로 찌들드가 결국 33세 한창 나이에 병으로 요절 하고 말았습니다. 세도 정치가들은 정치를 잘 모르는 왕을 이용해 국정을 마음껏 농락하다가 허수아비 왕의 죽음이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왕도 문제이고, 내 옷에 맞지 않은 옷도 문제이고, 문제를 해결하려 해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 할 수 없었던 외로운 왕이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