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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19대 임금, 탕평책과 숙종

by 리액션스타 2023. 12. 6.

 

1. 숙종은 누구인가?

숙종은 할아버지 효종, 아버지 현종을 이은 외아들로서 왕의 정통성을 제대로 이어 받아 1661년에 태어났습니다. 1720년 승하하기 까지 59년의 삶 중에 46년을 왕으로서 살았던 아들 영조에 이어 2번째로 긴 재위기간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특히,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은 아내를 명성왕후 김씨 한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도 없고, 또 이복 동생도 없었던 만큼 왕의 자리를 위협 받지 않고 무난하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숙종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성인이 되기 전에 왕이 되면 왕실의 여자 어른이 수렴첨정을 하는데 숙종은 그런 기간이 없이 직접 정치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고생 없이 왕의 정통성을 이어서 그런지 좋게 말하면 아버지 현종과는 다르게 성격이 굳건하고 주변의 눈치를 잘 보지 않는 스타일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불같고 괴팍하기 그지 없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괴팍했으면 한 성격하는 어머니 명성왕후도 감당이 안된다고 표현을 했을까요? 숙종시대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드라마에서 많이 보았던 훗날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 (장옥정), 영조의 어머니인 무수리 숙빈 최씨가 있습니다.

 

2. 숙종 시대의 사건

(1) 탕평책

조선 후기의 정치는 붕당정치였습니다.  오늘날의 여당과 야당이 있는 것 처럼 당시에는 특정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 당이 세분화 되었습니다. 특히 숙종 시대에는 서인과 남인 간의 대립이 심했습니다. 숙종은 이런 당파 싸움 때문에 조정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왕의 눈 앞에서 신하들이 싸우는 것이 꼴보기 싫어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서로간의 대립의 균형을 잡아준다는 명복으로 "탕평책"을 실시 합니다. 즉, 두 진영이 서로 싸우면 숙종이 심판 역할을 해 주어 한번은 이쪽의 손을 들어주고, 한쪽에 힘이 너무 실리는 것 같으면 다음번에는 상대편의 손을 들어 주면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숙종시대에는 이렇게 숙종이 손을 들어 주면서 국면이 전환되는 환국이 세번 일어나게 됩니다. 첫번째로 경신년에 일어났던 경신환국이고, 두번째는 기사년에 일어난 기사환국, 세번째는 갑술년에 발생한 갑술환국 입니다. 앞글자만 따서 경-기-갑, 그리고 환국 당시에 정권을 잡은 쪽은 서인, 남인, 서인으로 서-남-서 이렇게 외워볼까요?

 

(2) 경신환국 (1680년)

숙종이 왕이 될 당시에 정권을 잡은 쪽은 2차 예송 논쟁에서 승기를 잡은 남인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서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서인들에게 질릴 때로 질린 숙종은 남인들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정권을 잡으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큰 차이를 못 느끼듯이 당시에도 남인이 숙종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 했습니다. 숙종이 남인들에게도 실망을 느끼고 있을 때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남인의  수장 허적의 집에 잔치를 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이를 본 숙종이 허적의 잔칫날이 비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왕실의 비품인 기름천막 '유악'을 허적의 집에 가져다 주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하가 유악을 찾으러 가보니 이미 허적이 왕의 허락도 없이 왕실의 비품을 가져다 쓴 것입니다. 숙종이 허적에게 배려를 하려고 했었는데 이런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보고 화가 많이 났겠죠? 게다가 허적의 잔치가 남인들끼리의 회식 모임이었던 것을 알게된 숙종은 더 화가 났습니다. 화가난 숙종은 허적의 뒷조사를 실시 했는데 허적의 아들 허견이 역모를 꾀한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습니다. 결국 이 잔칫날이 제삿날이 되어 남인의 핵심인물인 허적과 윤휴가 죽게 되고 남인이 몰락하게 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되는데 이것이 바로 경신환국 입니다. 

 

(3) 기사환국 (1689년)

 숙종의 첫번째 부인인 인경왕후는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두번째 부인인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들였습니다. 인현왕후는 중전으로서 기품도 있고 인품도 좋았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다만 인현왕후 사이에 자식들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조선시대 유명한 미녀인 장옥정 (훗날 장희빈)이 나타납니다. 장희빈은 궁녀인데 숙종보다 2살 연상인 누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선 시대 궁녀는 가난한 집안의 딸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장희빈은 역관 집안의 딸로서 부유한 집안의 딸이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궁에 들어온 것은 아마도 정치적인 야심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남인이었던 장희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숙종과 장희빈을 떼어 놓기 위해 장희빈을 궁궐에서 쫓아 냈습니다. 중전인 인현왕후는 숙종이 장희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다시 장희빈을 궁궐로 불러 들이고, 둘 사이에서 훗날 경종이 되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숙종은 자기가 사랑하는 장희빈이 아들까지 나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요? 태어난지 2달 밖에 되지 않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서인들이 극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남인인 장희빈의 아들이 왕이 되면 서인들의 입지가 줄어들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겠죠. 서인들의 수장인 송시열은 원자 책봉이 너무 성급하다고 간언을 하다가 숙종의 대노를 사게 됩니다. 결국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으로 보내고 사약까지 내리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 세력이 떠오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입니다. 이 기사환국으로 인해 중전이었던 인현왕후는 폐비가 되어 궁궐밖으로 쫓겨나고 장희빈이 중전이 됩니다.

 

(4) 갑술환국 (1694년)

시간이 흐르자 숙종은 조강지처였던 인현왕후가 더욱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게 예뻤던 장희빈도 오랫동안 보니 이제 외모가 아닌 그의 성품이 보이기 시작했는지 후궁들에 대한 질투도 심했고 점점 방자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불이 켜진 방에서 상을 차려놓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무수리가 있었습니다. 숙종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물었고, 무수리는 인현왕후를 모시던 자였는데 그날이 인현왕후의 생신이라 혼자 상을 차리고 중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숙종은 이 무수리가 너무 기특하여 곁에 두게 되었고 숙종의 환심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반면에 장희빈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숙종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린 서인들은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갑술환국입니다. 기사환국으로 중전이 된 장희빈은 갑술환국으로 인해 다시 빈으로 강등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중전의 맛을 알아버린 장희빈은 중전 자리를 포기 하지 않고 궁안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향한 저주를 내렸고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숙종이 곧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 때문임을 알게 되었고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려 파란 만장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3. 평가

누구보다 끈끈한 왕의 정통성을 계승한 숙종은 강한 왕권을 위해 탕평책을 썼습니다. 왕권을 위협할 만한 무리가 나오면 반대파에 힘을 실어 균형을 맞추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 백성들의 삶을 위한 것 보다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훗날 영조라는 걸출한 임금을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준 메시아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 아쉬움을 달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