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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21대 임금, 예민하지만 완벽한 영조

by 리액션스타 2023. 12. 15.

1. 영조는 누구인가?

영조는 조선의 19대 임금인 숙종의 아들로 1694년 태어나 1776년 승하하기 전까지 83세로 장수한 왕 입니다. 사실 영조는 세자로써 왕의 될 위치에 있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배다른 형님인 경종이 있었고 영조의 어머니는 궁에서 빨래를 하던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조는 어린 시절 궁궐 안 보다는 궁궐 밖 사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백성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의 삶을 보고 느꼈습니다. 이런 어린 생활을 보낸 영조는 왕이 되어서도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이어갑니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에 컴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기 위해 사생활과 궁에서의 생활도 완벽하게 하는 임금이 되었습니다. 특히 영조는 1724년 재위에 올라 1776년 승하할 때까지 52년 동안 재위를 하 조선 최 장수 왕이자 최장 재위를 기록한 왕입니다.

2. 영조 시대의 사건과 업적

(1) 경종의 죽음

영조보다 앞서 왕이 된 20대 왕 경종은 영조의 형입니다.  경종은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경종은 왕이 되어서도 강한 왕권을 발휘하지 못하고 신하들에 이리 저리 휘둘리게 됩니다. 게다가 슬하에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신하들은 동생인 연잉군 (영조)를 세제로 책봉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삼게 되었는데 원래 병약하기는 했으나 경종이 갑자기 죽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종이 아파서 누워있을 때 영조가 형님의 건강 회복을 위해 게장과 감을 줬다고 하는데 몸이 낫는 듯 하다 다음날 갑자기 죽게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으나 영조는 독살설을 부인합니다.

 

(2) 백성을 사랑한 군주

영조의 업적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 중 하나가 균역법 입니다. 조선 시대 백성들이 내야 하는 세금은 토지에서 나는 곡물을 바치는 전세, 지역의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 그리고 노동력을 바치는 역 이렇게 3가지가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노동력을 바치는 역의 의무가 문제가 됩니다. 노동력 중에서도 군 복무를  하는 대신 병역 기피의 댓가로 군포 2필을 대신 납부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군역의 대상자는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남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에게도 부과를 하고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부과를 하고, 도망간 이웃의 몫까지도 부과하게 되면서 이를 기피하기 위해서는 2필이 아닌 훨씬 많은 양의 군필이 부과되기 시작하면서 백성들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영조는 백성들의 이런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군포 2필 대신 1필로 내게 하는 균역법을 실시합니다. 군포가 2필에서 1필로 줄어 들면서 부족하게 된 국가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는 토지 부과세를 부과하고, 왕가의 소득원이였던 어염세와 선박세를 국고로 환수하여 부족한 재정을 충당했습니다.

또한 죄인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가혹한 형벌 중 하나가 압슬형이 있는데 도자기 파편위에 무릎을 꿇게 하고 무릎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 아래로는 파편이 위로는 무거운 돌이 짓누르는 형벌입니다. 압슬형 외에도 낙형 등 평생을 수치스럽게 하는 형벌도 금했습니다.

 

(3) 사도세자

영조는 후사가 없다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이선 (사도세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늦게 얻은 귀한 아이에다가 이 사도세자는 어렸을 때 부터 매우 총명하고 글 공부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조는 자신의 컴플렉스 였던 정통성을 지우기 위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해 왔듯이 사도세자에게도 그 정도의 삶을 요구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자라면서 글 공부 보다는 무예, 그림 등 예체능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글 공부를 멀리하고 다른 짓을 하고 다니는 사도세자가  점점 못 마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넘겨 주기 위해 대리 청정을 시작했는데, 대리 청정을 하면서도 사사건건 사도세자를 대신들 앞에서 지적하고 무안을 주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점점 영조를 두려워하기 시작했고, 부자간의 대화도 없어졌습니다. 영조의 집착이 사도세자를 미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영조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에 사도세자는 그 화를 주체할 수 없었고 궁에서  짐승들도 죽였지만 곧 이어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숫자가 1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와중 결국 칼을 들고 영조까지 죽이려 찾아 갔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서 사도세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뒤주 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 합니다. 

 

그런데 왜 형벌을 받지 않고 뒤주에 들어가 죽음을 맞이 했을까요? 그것은 형벌로 처벌할 경우 연좌제에 의해 훗날 정조까지 다 처벌을 받게 되고 또 한번 왕의 정통성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형벌이 아닌 뒤주에서 죽게 했다고 합니다. 즉 영조는 사도세자를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나라의 왕으로서의 역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 (悼) 해서 슬픔을 생각하다는 의미로 사도 세자라고 이름을 지어 줬습니다.

3. 영조에 대한 평가

조선의 왕 중 가장 오랜 삶을 살았고, 가장 오랜 동안 재위에 있었지만, 가장 슬픈 사건인 자신의 아들을 죽인 왕 영조. 아마도 어려서 부터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던 탓에, 자신의 아들도 사랑이 아닌 왕으로서의 자질로만 보고 키우려 했었고, 사랑 없이 자란 자식이 어떻게 어긋날 수 있는지 보여준 극단적인 사례였던 것 같습니다. 왕으로서는 Perfect, 아버지로서는 Poor 했던 영조, 비록 많은 악행은 저질렀으나 안타까움이 많은 사도세자의 이야기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