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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23대 임금, 약한 몸과 세도정치에 짓눌린 순조

by 리액션스타 2023. 12. 22.

1. 순조는 어떤 인물인가?

순조는 조선 후기 가장 완벽한 임금이라고 생각되는 정조의 아들로 1790년에 태어났습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당시 길지라고 알려진 수원으로 정하고 얼마 후 늦둥이 순조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가 병인지 독살인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고 어린 순조가 1800년 11세의 나이로 즉위를 하게 됩니다. 왕이 어렸기 때문에 직접 정사를 돌보기가 어려워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영조가 66세일 때 15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조 보다도 훨씬 어렸었지만 왕실의 최고 어른인것은 맞았습니다. 문제는 정순왕후는 노론 중에서도 사도세자의 죽음에 적극 가담했던 벽파쪽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사랑했던 정조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남인 시파 사람들의 정적이었던 것입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재위기간 24년간 이루어 놓은 것들을 모두 되돌려 놓기 시작했습니다. 벽파쪽 사람들을 불러 오고, 규장각의 권한을 축소하고, 장용영을 폐지합니다. 

그러나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 첨정이 끝나고 난 후 정무를 열심히 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인 정조인데 순조도 보통 사람 이상은 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뭔가를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몸이 많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있어서 왕의 지위를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넘기고 싶어 했습니다. 효명세자 역시 똑똑하고 기품도 있는 세자 였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입장에서는 삶의 희망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1800년 부터 1834년까지 34년 이라는 긴 시간동안 왕으로 재위하였으나 많은 업적을 남기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효명세자의 단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2. 순조 시대의 주요 일들

(1) 세도 정치의 등장

세도 정치의 본 의미는 '정치의 도리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 이라는 정치 본연의 뜻을 담고 있지만 점점 외척 정치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즉 외가 친척들이 정치에 끼여 들어 권력을 독점하고 남용하는 정치가 된 것입니다.

세도정치는 제 23대 순조 시대부터 25대 철종까지 3대에걸쳐 약 60년간 이루어 지는데 안동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아들 순조가 왕이 되었을 때 순조를 지켜줄 수 있는 정치 세력을 만들어 주고 싶어 했고 당시 세간의 평이 좋은 김조순의 집안을 낙접하였습니다. 그래서 김조순의 딸을 순조와 결혼을 시키게 되었는데 갑자기 권력을 갖게 되면 사람이 변하는지 김조순의 아들들이 순조의 이름을 등에 없고 자기들 마음대로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훗날 홍경래의 난이 발발합니다.

 

(2) 홍경래의 난 (1811년)

조선 후기는 청과의 교역이 활발해 지면서 조선 서북에 위치한 평안도 지방의 상공업이 번성하기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만큼 세도 세력들에 의한 수탈도 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피해를 받으면서도 특정 가문에 의한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평안도 출신이란 이유로 궁궐의 주요 요직에 임명 되지 못하였고 차별은 더욱 심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불만이 쌓이던 중 1811년 몰락한 양반 홍경래와 그 뜻을 함께 한 사람들이 큰 세력을 이루면서 난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상인들이 홍경래를 지원하였고, 많은 백성들도 지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도 홍경래의 난을 단순한 민란으로 본 것이 아니고 조선이 변해야 한다는 하나의 신호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막을 나렸지만, 백성들이 억울한 일에 대해 스스로 해결하고자 목소리를 낸 것이었고, 조선 후기 이후의 민란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3) 신유박해 (1801년)

조선 후기에는 청과의 교역이 활발해 지면서 성리학 이외에도 서양의 학문과 종교가 조선에도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천주교는 하늘 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데 이는 위계 질서가 명확한 성리학과는 배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중시하는 조선의 풍습과는 반대로 하느님외에 다른 우상 숭배를 전면 금지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좋은 시선을 보지 않았습니다.
정조 시대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있지 않았지만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천주교애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 중에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의 정적인 남인 시파들이 많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탄압을 한 것입니다. 1801년에 최초의 천주교에 대한 대규모 박해가 일어났고 이것이 바로 신유박해 입니다.

(4)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

효명세자는 순조의 맏아들로써 태어난 후 3년이 지나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할아버지 정조의 피를 이어 받아서였는지 공부도 열심히 했고, 영특했습니다. 몸이 병약한 순조는 총명한 아들에게 왕위를 빨리 넘겨 주고 싶어 했고 효명세자가 19세가 된 해에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습니다. 효명세자는 세도 정치의 문제를 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특정 가문도 정파도 아닌 실력이 있는 박규수 등의 실학자들을 궁궐로 불러 들여 무너져 가는 조선을 다시 일으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대리 청정 3년만에 22세의 나이로 요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순조는 효명 세자의 죽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고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효명세자가 죽는 바람에 세도 정치가 좀 더 빨리 끝나지 않고 2대를 더 걸쳐 철종대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3. 순조에 대한 생각

정조의 피를 이어 받아 훌륭한 자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따라 주지 않았고, 외척들의 간섭 때문에 본인의 뜻을 펼치지 못한 아쉬움이 많은 임금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인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 효명세자가 이어주길 바랬으나 아들 마저 일찍 죽는 바람에 세도 정치를 끝내지 못하고 조선이 망국으로 가는 길을 막지 못했던 비운의 왕이 아닌가 싶습니다.